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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군이 13배의 중공군 막아낸 가평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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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전투(Battle of Kapyong)
오늘 나는 모든 캐나다인들이 한국 전쟁에 대해 더 많이 배울 것을 강력하게 촉구 합니다 그리고 참전용사분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활동에 참가하기를 부탁 드립니다 -캐나다 총리 저스틴 트루도- Today, I urge all Canadians to learn more about the Korean War, and to participate in activities being held to honour the veterans. -Prime Minister Justin Trudeau-

캐나다 인구는 3천6백만명, 미국 인구는 3억 2천 3백만명, 한국 인구는 5천만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나다는 한국전쟁때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캐나다 전체 군대의 1/2을 한국으로 보낸 것.. 캐나다 전쟁 역사상 가장 유명한 승리는 가평 전투 - 캐나다군 700명 VS 중국군 5,000명

1950년 6월 30일, 캐나다 하원은 한국파병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여 2만 7천명의 청소년부터 2차 대전 베터랑이 포함된 캐나다 군인들이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1951년 4월 23일 가평에서 뉴질랜드, 캐나다, 호주 군이 영국군을 중심으로 편제된 영연방 27여단이 중공군 20군과 전투.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13배가 넘는 중공군을 상대로 싸운 말이 안되는 전투였다. 가평전투 당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참호까지 밀고 들어오며 고전하게 되자, 뉴질랜드군 포병대대에게 자신들의 위치로 곧바로 포격을 할 것을 요청하는 패기까지 보여줬다 ㄷㄷ 참호 안에서 싸우는 자신들보다 엄폐물 없이 노출된 중공군의 피해가 더 클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라고.. 무전을 받은 뉴질랜드군도 처음엔 놀라 선뜻 포격하지 못하다가 결국 해줬고 캐나다군의 의도대로 방어에 성공하게 된다. 4월 25일 전투 후에 미군과 한 대화는 가히 압박이다. 미군은 아예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가정하고는 들어온 통신이 적군의 것인 줄 알았다는데, 미군이 캐나다군과 ANZAC군(호주군+뉴질랜드군)이 패배했을 것이라 지레짐작한 이유는 캐나다군과 함께 가평을 사수하던 호주군이 병력의 40%를 잃은 뒤 이미 후퇴를 해 실질적으로 전선을 지키던 보병 병력은 캐나다군 1개 대대의 450명이 전부였던 반해 중공군은 1개 사단 6000명이 밀고 내려오던 상황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캐나다군은 방어에 성공했고, 47명 전사자에 99명 부상자를 낸 반면 중공군은 최소 1000명에서 최대 4000명 이하가 사상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가평 전투에서 큰 좌절을 겪은 중공군은 이후 더이상 대대적인 공세를 퍼붇지 못 하고 38선까지 후퇴해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어 한국전쟁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가평 전투의 공로로 캐나다군과 호주군은 미국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는데 이것은 캐나다군이 최초로 미국으로 부터 수여받은 표창이다.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는 휴전 후 캐나다를 최우선 수교대상국으로 지정하였고 1963년에 수교를 맺었다. 지금까지 캐나다에서 본 모든 전쟁 기념물과 주 의사당에는 한국 전쟁 기록이 반드시 세겨져 있다. 캐나다인들은 가평 전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캐나다군의 위니펙 주둔지를 가평(Kapyeong Barrack)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놀랍게도 캐나다 도로이름에도 가평(Kapyong Rd)이 들어가는 곳들이 다수 있기도 하다. 온타리오에도 있다 -아래 지도 참고-

Kapyeong Barrack

윈스턴 처칠은 '나에게 캐나다 병사와 미국의 기술력, 영국의 장교들이 주어졌다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캐나다군이 맹활약을 한 분야도 저격, 강습, 게릴라전 등의 소수의 병사들의 악과 깡으로 버텨야 하는 분야들이 많다고 한다. 참, 캐나다군의 겨울전투는 전세계 최고라고 한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조센징들 특성상 정기적으로 캐나다의 고마움을 환기시켜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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